정태수열사의 삶, 사진

정태수열사 추모글 1

정태수열사 추모제의 박경석 대표

정태수 동지를 기억하며!

노들장애인야학 박경석

  “가슴이 빠게지도록 사무치는 이강산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거부하자던

복종을 달게받지 않겠다던

  굳게 서 있으라 의연한 산하

쉬지말고 흘러라 의연한 강물아”

88년 3월.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83년에 장애를 입고 5년동안 집구석에서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다가 다시 한번 살아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집근처의 장애인복지관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나보다는 7살이나 어리지만 태수를 복지관에서 컴퓨터를 배우는 전산과 동기로 만났다. 그 당시 나는 소위 말하자면 ‘착한장애인’ 부류였고, 태수는 ‘나쁜장애인’ 부류였다. 복지관에서 결정해 놓은 장애인 직업재활프로그램에 충실하는 것만이 오직 장애인으로써 살아남기 힘든 세상에서 유일한 길처럼 생각했었다. 그래서 방송국 같은 곳에서 ‘장애인인식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촬영하러 오면 항상 복지관선생님은 나를 추천했고 그래서 나와 휠체어를 탄 장애여성 한명을 커플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열심히 재활의 의지를 불태우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그럴때면 태수는 비록 목발을 짚었지만 언제나 날랜 제비처럼 어디론가 날라버렸다.

태수는 복지관에서 만들어 놓은 재활프로그램에 대한 반란자였다. 장애인들은 체력과 정신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고안된 프로그램으로 점심시간에 훈련생은 밥먹고 모두 모여 국민체조를 해야했다. 복지관의 직원들은 모두 점심먹고 자유시간을 즐기는데… 작은 반란은 주로 술자리에서부터 모의되고 다음날 실천되었다. 그 핵심에 태수가 있었다. 술자리에서 발빠르게 몇 명을 후다닥 조직하고 그리고 바로 다음날 ‘배째버리기’가 특기였다. 밥먹고 국민체조 거부하기를 시작했다. 상당기간 갈등들이 존재했지만, 결국 국민체조는 사라져버렸다.

88년 장애인의 기본적인 생존권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기만적인 ‘심신장애자복지법’ 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척박한 현실에서 88올림픽의 일환으로 형식적으로 치루어야 했던 장애인올림픽을 거부하며 조직위원회 점거농성을 주도했던 고 박흥수 선배의 꼬임(?)으로 89년 복지관을 수료하고 복지관동문회인 ‘싹틈’에서 태수와 나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89년에 ‘싹틈동문회’에서 발행되는 소식지가 도둑맞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연은 소식지에 복지관을 졸업한 학생들의 취업률과 현실에 대한 설문조사를 발표한 글이 실려있었다. 복지관은 서울시로부터 수료생들의 취업률을 90%가 넘는다고 보고하고 있었다. 그 실적은 서울시로부터 받는 예산의 문제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동문회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90%이상이 실업자로 살아가고 있었고, 그나마 취업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6개월이상 실습이라는 명목으로 5만원이하의 교통비도 되지않는 돈을 받으며 농동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못견뎌서 나오면 모든 것이 의지가 약한 장애인들의 탓이었다. 그래서 장애인들은 내탓이요 가슴을 두들기며 또다시 반성하게 만드는 것이 복지관에서의 취업교육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폭로한 동문회 소식지를 복지관측에서 모르게 압수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래서 복지관을 점거하고 농성하였다. ▶ 서울시장 면담 ▶ 복지관의 공개사과 ▶ 장애인의 취업보장 등의 요구를 걸고 농성을 시작한 날 태수는 삭발을 하고 나타났다. 처음 농성을 경험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만큼 충격이었고 멋적게 웃는 태수의 모습에서 투쟁의 의지를 읽었다.

태수가 항상 부르는 노래가 있었다. ‘가슴이 빠게지도록…’ 처음에는 그 노래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태수가 굉장히 반항적이라는 느낌뿐이었다. 아직도 사춘기라서 그런가, 세월이 지나면 좀 인간이 되겠지라 생각했다. 내가 생각했던 인간은 아무리 세상이 장애인소외시키고 억압해도 세상의 기준에 복종하며 순종하며 시혜와 동정의 껍질에 떡고물을 따먹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착한장애인’의 모습이었으리라. 그러한 모습이 바로 또다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구조화시키고 장애인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재생산하고, 차별에 대하여 장애인 스스로 조직하여 투쟁하는 저항정신을 해체시키는 지름길이라느 것을 그때는 깨닿지 못했다.

태수의 노래가 굴종적인 ‘착한장애인’으로 살고자 했던 내 삶을 변화시켰다. 14년의 세월을 ‘장애해방’의 한 길에서 만나온 태수의 삶을 보면서 그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복지관에서 가슴이 빠게지도록 목청을 높여 불렀던 노래가 단순히 사춘기의 반항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장애인들이 이 탐욕스런 자본의 세상에서 알게 모르게 강요당하는 차별에 대한 사무치는 분노라는 것을 배웠다.

대학을 준비하던 중에도 자신의 안일보다 불의를 참지 못해 참여하였던 정립회관 시설비리 투쟁,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장애인들이 먹고살기 위해 노점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최정환 열사의 분신과 이덕인 열사의 의문사 투쟁에 헌신했던 태수의 모습에서 투쟁의 현장에 굳게 서있는 산하를 보았다. 그 산하는 ‘세상을 바꾸는 투쟁’에 헌신하는 동지들의 지향이었다.

‘살아남은 자여, 조직하라!’ – 복지관의 ‘싹틈’동문회,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서울DPI 활동, 그리고 청계천8가에서의 노점자리 확보를 위한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 노들장애인야학, 청년학교 등 수많은 조직사업, 장애인노동권확보를 위한 걷기대회를 매년 전국적으로 조직하면서 투쟁한 태수의 활동 모습에서 활동가로써 쉬지말고 흐르는 강물을 보았다. 그 강물은 ‘장애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동지들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소중한 생수였다.

‘이제 세상을 바꾸자! – 태수가 가슴이 빠게지도록 목놓아 외쳤던 것이 바로 세상을 바꾸는 노래였다. 그 노래를 통해 태수는 산하와 강물같은 동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제 태수를 ‘정태수 동지!’라 부르리라. 동지의 투쟁은 장애인의 문제가 단순히 장애인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집단이기주의나 조직이기주의 투쟁이 아니었다. 동지의 노래를 통해 자본의 세상에서 장애인이 소수자로써 차별받는 근본적인 문제제기와 세상을 바꾸는 투쟁을 배웠다. 동지는 행동으로 장애인들이 시혜와 동정의 껍데기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세상을 향하여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당당하고 비타협적인 투쟁을 전개해야한다는 것을 많은 사람에게 가르쳐주었다.

장애인의 문제에서 장애인의 주체를 말한다. 그 당연함이 왜곡되어 자본의 세상을 바꾸든지 말든지, 보수와 진보의 구분도 없이 현실적 이익에 따라 장애인주체를 이용하고 현장투쟁을 재단하고 멈추려하는 자들이 활개치는 지금의 막막한 장애운동의 현실에서 정태수 동지의 산하와 강물같은 투쟁의 모범이 더욱 그리워진다.

장애운동이 바로 탐욕스러운 자본의 얼굴을 미화시키려는 전략으로 주어진 시혜와 동정의 떡고물에 체재내화 되어진다면 그것은 정태수 동지를 다시 한번 죽이는 것이다. 그 자본의 세상에서 가장 차별받고 소외된 당사자들이 당당하게 일어나 자본의 세상을 뒤집어버리는 투쟁을 조직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지향을 저버리고 현실적 이익에 매몰된 전술만으로 장애인당사자주의를 이용하여 당사자들의 투쟁을 왜곡하는 순간 우리는 정태수 동지를 영원히 묻어버리는 역사의 과오를 범할 것이다. 그것은 단호히 현장투쟁으로 막아내야 한다

정태수 동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당당한 투쟁으로 살아남기를 바란다. 그 길에 언제나 동지가 가르쳐 준 노래를 부르며 동지가 만들어 가는 투쟁에 언제나 함께 할 것이다.